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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슈

팀 켈러가 우리에게 남긴 유산 (6) : 우상숭배와 복음
by 고상섭2023-06-28

팀 켈러가 우리에게 남긴 유산

팀 켈러가 그토록 사랑했던 하나님의 품에 안겼다. 이제 눈물이 없는 곳에서 기뻐할 팀 켈러를 생각하면 위로가 되지만, 남아있는 사람들에겐 그가 떠난 빈자리가 너무나 크게 느껴진다. 누구도 대신할 수 없을 만큼 독보적인 존재로 그는 다양한 분야에서 발자취를 남겼다. 그와 그의 삶이 우리에게 남긴 위대한 유산 몇 가지를 되돌아보며 그를 기억하고자 한다.  

팀 켈러가 우리에게 남긴 유산을 정리하면서 ‘복음을 가장 먼저 거론했다. 팀 켈러를 통해 복음을 재발견했다는 사람이 많은 이유는 복음 자체를 몰랐다기보다 복음에 대한 잘못된 오해를 바로잡았기 때문이다. 팀 켈러가 전한 복음의 내용은 이미 알고 있는 것이었지만, 그가 복음을 전달하는 방식이 남달랐기 때문에 많은 사람이 팀 켈러를 통해 복음을 재발견했다고 고백하고 있다. 복음은 좋은 소식이지만, 그 이전에 나쁜 소식이어야 한다. 내가 죄인이며 나의 힘으로 구원에 이를 수 없다는 나쁜 소식이 선포될 때 그리스도께서 내 죄를 대신해서 죽으셨다는 사실이 기쁜 소식이 될 수 있기 때문이다. 기쁜 소식 이전에 나쁜 소식으로 인도하는 팀 켈러의 복음 전달 방식은 우상숭배를 깨닫게 한다. 


무엇이 우상인가? 


내가 처음 맨해튼에서 사역을 시작했을 때, 그곳에서 기독교의 죄 개념에 대한 문화적 알레르기 반응을 접하게 되었다. 그럼에도 우상숭배에 관한 성경의 광범위한 가르침을 전했을 때 사람들을 가장 많이 이끌어낼 수 있었다. 나는 죄를 “여러분의 삶의 의미를 하나님이 아닌 다른 것 위에, 비록 그것이 아주 좋을 것일지라도 세우는 것”이라고 설명했다.[1]


팀 켈러는 포스트모던 시대에 사는 뉴욕의 청중에게 기독교의 죄 개념을 가르친다는 건 어렵다는 것을 알았다. 죄에 대한 문화적 기준이 달라졌기 때문이다. 이런 상황 속에서 팀 켈러는 시대에 맞는, 그러나 더 깊고 넓은 관점으로 죄를 설명하는 방법을 찾았다. 그것이 바로 ‘우상숭배’의 개념으로 죄를 설명하는 것이었다. 


기존의 죄의 설명은 인간의 행위적 죄에 대한 설명이 주를 이루었다. 그러나 팀 켈러는 죄를 짓는 마음의 동기를 살피고, 비록 죄로 인식하지 못하는 영역이지만 그것이 죄가 될 수 있다고 경고한다. 


사람아, 이들은 여러 우상을 마음으로 떠받드는 사람들이며, 걸려 넘어져서 죄를 짓게 하는 올가미를 자기들 앞에 둔 사람들인데, 내가 과연 이런 사람들에게 질문을 받을 수가 있겠느냐? (에스겔 14:3)


대체로 사람들은 우상이라고 하면 눈에 보이는 신상을 떠올린다. 유명 “아이돌” 가수를 떠올릴 수도 있을 것이다. 그러나 성경은 인간의 마음속에서 이루어지는 우상숭배를 이야기한다. 머리에 뿔이 달린 악마가 아니라 내 마음속에서 하나님 자리를 대신 차지하고 있는 것이 바로 우상이다. 


팀 켈러는 내가 만든 신에서 우상을 이렇게 정의했다. 


우상이란 무엇인가? 무엇이든 당신에게 하나님보다 더 중요한 것이다. 무엇이든 하나님보다 더 크게 당신 마음과 생각을 차지하는 것이다. 하나님만이 주실 수 있는 것을 다른 데서 얻으려 한다면 그게 바로 우상이다.[2]


그럼 내 안에 우상이 존재하는지는 어떻게 알 수 있을까?


팀 켈러는 슬픔과 절망의 차이를 구분하는 것이 중요하다고 말한다. 슬픔은 위로받을 수 있는 고통이다. 슬픔은 여러 좋은 것들 가운데서 하나를 잃었을 때 찾아온다. 예컨대 직장에서 낭패를 겪었다면 가정에서 위안을 얻어 헤쳐 나갈 수 있다. 반면에 절망은 위로받을 길이 없다.  궁극적인 것을 잃었을 때 찾아오기 때문이다.[3]


이렇게 내 삶을 절망으로 이끌어가는 것이 있다면, 그것이 내 안의 우상일 가능성이 크다. 가장 의지했던 것이 사라졌기 때문이다. 


자녀를 사랑하는 것은 선한 일이다. 그러나 자녀를 하나님보다 더 사랑하게 되면 자녀를 우상숭배의 위치에 올리게 된다. 자녀를 하나님 자리에 두는 것이다. 자녀가 부모의 기대에 어긋나게 행동하거나 부모를 실망시킬 때, 단순한 슬픔을 넘어 절망의 단계까지 나간다면 자녀가 우상이 되었기 때문이다. 배우자의 배신에 인생이 무너지는 것처럼 고통스럽고, 성경을 읽고 싶지도 교회 나가고 싶지도 않을 만큼 절망에 빠져있다면, 그것은 배우자를 하나님보다 더 사랑한 삶의 결과이다. 거기에서 회복될 때는 “내가 하나님보다 배우자를 더 사랑했습니다”라는 회개를 통해 회복된다.


사랑의 순서


결국 우상은 하나님보다 더 사랑하는 대상이며, 이것은 사랑의 순서의 문제이다. 아우구스티누스는 죄를 ‘순서가 바뀐 사랑’이라고 정의했다. 가장 사랑해야 할 하나님이 계셔야 하는 자리에 다른 사랑이 대체된 것이 죄이며 곧 우상숭배이다. 사랑에는 순서가 있다. 하나님을 가장 사랑할 때 삶의 순서가 세워지게 된다. 


아우구스티누스는 사랑을 두 가지로 나누어 ‘향유하는’ 사랑(Frui)과 ‘사용하는’ 사랑(Uti)로 설명했다. 


어떤 대상을 향유 곧 즐기는 것은 그 자체를 위하여 사랑한다는 말이다. 반면에 어떤 대상을 사용한다는 말은 더 높은 차원의 목적을 위하여 잠시 수단으로 쓴다는 말이다. 하나님은 향유하는 사랑의 대상이시고, 나머지는 사용하는 사랑의 대상이 되어야 한다.[4] 사용의 대상이 되는 사랑을 향유의 자리에 올릴 때, 우상숭배가 되고 우리는 가짜 하나님을 섬기게 되는 것이다. 


결국 죄는 순서가 바뀐 사랑이고, 죄에서의 회복은 사랑의 순서를 바꾸는 것이다. 하나님보다 더 높은 자리를 차지하는 모든 것은 아무리 좋은 것이라 할지라도 우상숭배가 된다. 반지의 제왕에서 중요한 소재는 악의 군주 사우론이 소유한 ‘절대반지’이다. 아무리 선한 의도에서라도 이 반지를 끼려는 사람은 누구나 탐욕에 물들게 된다. 톨킨에 해박한 톰 피쉬 교수는 이 반지를 ‘심리적 증폭기’라고 불렀다. 마음의 가장 절실한 갈망을 우상으로 확대한다는 뜻이다. ‘반지의 제왕’에서 선한 의도를 가진 등장인물들도 반지를 끼고 나면 그 선한 의도를 이루기 위해 물불을 가리지 않고 무슨 수를 써서라도 목표를 이루려고 한다. 반지가 좋은 것을 절대화해서 다른 모든 도의나 가치관을 전복시킨다.[5]


톨킨이 말하는 ‘절대반지’는 좋은 의도와 좋은 목표를 가지고 있더라도 그것이 절대화될 때 악한 일이 된다는 것을 보여준다. 우상도 마찬가지이다. 우리가 추구하는 모든 우상은 대부분 좋고 선한 가치들이다. 인간의 마음은 우상 공장이다. 성공, 사랑, 가족, 재물 등 모든 좋은 것을 궁극적인 것으로 탈바꿈시켜 버린다. 미국 캘리포니아 코너스톤 교회를 개척했던 프랜시스 첸은 부부 제자도에서 “결혼은 중요하지만 가장 중요한 것은 아니다”라고 말한다. 결혼은 중요하고 선한 것이다. 그러나 그 선한 결혼도 가장 중요한 것이 되어버릴 때 그것은 가짜 하나님, 우상이 된다. 


우상숭배의 위험성 


우상숭배의 위험성은 그것이 우리를 노예로 삼기 때문이다. 하나님 자리에 다른 것을 숭배하게 되면 우리는 그것에 속박된다. 사사기는 그 패턴을 가장 잘 보여주는 성경 중 하나인데, 여기서 이스라엘은 죄와 회개와 우상숭배를 반복한다.


이스라엘 자손이 다시 주님께서 보시는 앞에서 악을 저질렀다. 그들은 바알 신들과 아스다롯과 시리아의 신들과 시돈의 신들과 모압의 신들과 암몬 사람의 신들과 블레셋 사람의 신들을 섬기고, 주님을 저버려, 더 이상 주님을 섬기지 않았다. (사사기 10:6


바알과 아스다롯은 가나안의 신이었다. 아람과 시돈의 신들은 북쪽의 신, 암몬과 모압의 신들은 동쪽의 신, 블레셋은 남쪽의 신이다. 이스라엘이 섬겼던 신들은 모두 그들을 억압했던 민족들의 신들이었다. 첫 번째 사사인 옷니엘이 아람에, 에훗이 모압과 암몬에, 삼갈이 블레셋에, 드보라가 가나안에 대항해서 이스라엘을 구했다. 다시 말해, 이스라엘이 어느 나라의 우상을 숭배할 때마다 그 나라가 결국 이스라엘을 압제하게 되었다. 이것은 우리가 우상을 숭배할 때 그 우상의 예속상태로 이어진다는 것을 알려준다. 우상숭배는 종살이로 이어지고, 그 종살이는 다시 우상숭배로 이어진다. 


이런 패턴은 사사기뿐 아니라 오늘날도 마찬가지다. 


만일 어떤 사람이 가치와 목적을 사람과의 관계에서 찾는다고 하자. 예를 들어, 결혼 생활을 위해 모든 것을 희생하다가, 결혼 생활이 실패한다고 하자. 그러면 자연히 생각하기를 ‘다른 사람을 찾아야 해, 더 좋은 배우자가 필요해’라고 생각한다. 우리는 우리의 문제를 우상숭배가 아니라 우상을 충분히 숭배하지 않은 것으로 본다.[6]


또 팀 켈러는 건강한 교회를 세우는 비전 또한 우상숭배가 될 수 있다고 경고한다. 한 목회자가 건강한 교회를 꿈꾸고 교회를 개척했는데 교회가 건강해지지 않는다면 먼저 자기 자신을 향한 질책과 비난이 이어진다. “나는 잘 못해” “나는 개척이 맞지 않아” 같은 내면의 소리를 듣게 되고 나아가 다른 사람을 향한 비판이 이어진다. “이런 설교를 듣고도 변하지 않는 성도들이 문제야.” 또 교회를 건강하게 만들지 못하는 외부 환경의 문제에 두려움을 느낀다. 교회 월세가 오르거나 교회를 이전해야 하는 문제들에 불안해진다. 건강한 교회를 위해서 꿈꾸고 날마다 기도하지만 목회자의 마음속에 자신을 향한 비난, 상대방을 향한 비판, 그리고 외부에 대한 두려움이 가득하게 되는 이유는 바로 건강한 교회라는 꿈이 하나님을 사랑하는 것보다 더 높은 위치에 있는 우상숭배였기 때문이다. 


하나님을 가장 사랑하는 것을 목표로 두면, 교회가 좀 건강해지지 않아도 더 예수님을 닮아가는 과정으로 알고, 또 교회가 건강해지면 하나님께 감사하고 영광을 돌리게 될 것이다. 이렇듯 우상숭배가 위험한 이유는 죄처럼 보이지 않기 때문이다. 어쩌면 선한 것으로 보이기도 하므로 죄가 아닌 선한 것으로 착각하기도 한다. 


탕부 하나님에서 돌아온 동생에게 분노하는 첫째 아들은 “나는 이렇게 여러 해를 두고 아버지를 섬기고 있고, 아버지의 명령을 한 번도 어긴 일이 없는데, 나에게는 친구들과 함께 즐기라고, 염소 새끼 한 마리도 주신 일이 없습니다”(눅 15:29)라고 토로한다. ‘여러 해’는 많은 시간을 의미하고, 그는 아버지의 명에 순종하는 도덕적인 삶을 살았다. 그는 선한 삶을 산다고 생각했을지 모르지만 결국 도덕적 삶을 통해 아버지를 통제하고 싶어 하는 우상숭배를 한 것이다.


그가 아버지에게 그토록 노한 까닭은 무엇인가? 그는 집안의 옷이며 반지며 가축을 어떻게 써야 할지 자신의 의견을 낼 권리가 있다고 생각했다. 마찬가지로 종교적인 사람들도 대게 아주 도덕적으로 살지만 그들의 목표는 하나님을 수단으로 이용하고, 그분을 통제하고, 자기네 생각대로 그분께 의무를 지우는 것이다. … 당신도 순종을 통해 하나님을 통제하려 든다면 당신의 모든 도덕은 하나님을 이용하는 수단에 지나지 않는다.[7]


이렇듯 우상숭배는 우리의 삶은 가짜 신을 섬기지만, 입술의 고백만으로 하나님을 잘 섬기고 있다는 착각을 불러일으킨다. 걱정과 스트레스 상황에서 하나님께 나아가지 못하는 것을 심각하게 생각하지 않는 그리스도인이 많다. 이것이 우상숭배의 가장 큰 위험성이다. 우상숭배를 하고 있는지도 알지 못하는 상황에서도 우리는 우상의 노예로 살아갈 수 있기 때문이다. 


표면적 우상과 근원적 우상


팀 켈러는 우리 안에서 우상을 발견하기 어려운 또 다른 이유에 대해 우상이 표면적으로 드러나는 부분과 내면 깊은 곳에 숨겨진 부분이 다르기 때문이라 말한다. 그래서 겉으로 드러난 부분만이 아닌 내면의 뿌리까지 깊숙이 들어가야 한다. 자기 내면에 있는 우상을 발견할 때, 돈, 성공, 사랑 같은 겉으로 드러나는 부분만 있는 것이 아니다. 우상숭배의 심리는 이보다 더 복잡하다. ‘표면적 우상’은 더 구체적이고 눈에 잘 띄지만, 숨겨진 마음속에는 잘 보이지 않는 ‘근원적 우상’이 도사리고 있다.


돈을 사랑하는 표면적 우상도 근원적으로는 돈을 통해 인정을 원하는 우월감이 내면에 작용할 수도 있고, 돈을 이용해서 사람들을 통제하고 싶은 욕구가 있을 수도 있다. 또 돈을 가지고 있으면서 느끼는 안정감이 우상이 되기도 한다. 같은 돈이라는 표면으로 드러나지만, 통제, 안정, 우월감 등의 다양한 근원적 우상이 존재할 수 있다.[8]


근원적 우상에 대한 이해가 없으면 늘 피상적인 우상만을 다룰 위험이 있다. 팀 켈러는 제임스라는 한 목회자의 이야기를 통해 근원적 우상의 위험성을 설명한다. 


제임스는 예수님을 믿기 전 여색을 밝히기로 유명했고 매번 여자를 유혹해 잠자리를 갖고 나면 이내 흥미를 잃어버리는 사람이었다. 그가 기독교를 받아들이고 성적 일탈을 끊고 기독교 사역에 매진했지만 근원적 우상은 달라지지 않았다. 수업이나 토론 때마다 그는 논쟁을 일삼으며 이기려 했고 자신이 회장이 아닌 모임에서도 늘 회장 행세를 하려고 했다. 자신의 새로운 신앙 주제로 대화할 때도 회의론자들을 거칠게 해서 마찰을 일으켰다. 


결국 그의 의미와 가치는 그리스도께 옮겨진 게 아니라 여전히 타인에게 권력을 행사하는 것에 기초해 있음이 분명해졌다. 그런 권력을 통해 그는 자신이 살아있음을 느꼈다. 제임스가 여러 여자와 잠자리를 한 것은 그들에게 매력을 느껴서가 아니라 마음만 먹으면 동참할 수 있다는 권력을 얻기 위해서였다. 권력만 얻으면 여자는 더 이상 흥밋거리가 못 되었다. 기독교 사역도 사람을 섬기고 싶어서가 아니라 권력을 얻기 위해서였다. 권력의 우상이 성적인 형태에서 종교적인 형태로 바뀌었을 뿐이었다. 그렇게 우상은 꼭꼭 숨어있다.[9]


문화 내러티브 속의 우상  


팀 켈러는 우상이 단지 개인의 마음속에만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그 마음에 영향을 주는 문화에서부터 출발한다고 말한다. 우상은 한 개인의 삶에만 영향을 주는 것이 아니라, 한 세대 전체에 영향을 미치기도 한다는 것이다. 영국의 문화 비평가인 테리 이글턴은 18세기 합리주의를 거치면서 신이 사라지고, 비록 그 역할을 잘 감당하지는 않았지만, 이 시대에 신의 대리 역할로 등장한 것이 바로 예술, 이성, 문화라고 말한다.[10]


데이비드 폴리슨은 ‘마음의 우상과 허영의 시장’(Idols of the Heart and Vanity Fair)이라는 논문에서 우상숭배로 인간을 몰아가는 세 가지 대상이 있다고 말한다. 육신과 세상과 마귀이다. 육신은 인간 안에 있는 욕망을 다루기 때문에 개인적 차원의 문제라고 할 수 있지만, 세상의 영향을 받는 것은 단순히 개인의 죄의 문제가 아닌 문화가 주는 영향력이다. 


‘허영의 시장’은 존 번연의 천로역정에 나오는 장소를 비유한 것이다. 주인공 ‘크리스천’이 사망의 골짜기를 빠져나와 ‘믿음’을 만나 서로의 간증을 나누면서 도착한 곳이 ‘허영의 시장’이었다. 그곳에서는 온갖 욕망을 팔고 있었고, 진리를 찾다가 믿음은 순교하고 크리스천은 감옥에 갇히는 일을 겪게 된다. 데이비드 폴리슨은 우상이 한 개인의 욕망만이 아니라, 허영의 시장이라는 문화가 주는 영향력이 있음을 이야기한다. 팀 켈러도 데이비드 폴리슨의 죽음을 추모하는 글에서 기독교 상담이 가지는 약점 중 하나가 개인의 죄에만 집중한다는 것이었는데, ‘마음의 우상과 허영의 시장’에 대한 폴리슨의 가르침 덕분에 문화에 내재하는 죄의 영향력을 해결하는 방법을 알 수 있었고, 내가 만든 신이라는 책도 데이비드 폴리슨의 영향력으로부터 시작되었다고 고백했다.[11]


팀 켈러가 설교와 변증에서 문화 내러티브의 모순을 드러내는 방식으로 설교하는 이유도 바로 여기에 있다. 바로 문화 속에 있는 우상을 드러내는 것이다. 


우상은 목상 앞에 절하는 원시인을 떠올리지만 … 현대도 동일한 우상을 섬기고 있다. 문화마다 그 문화를 지배하는 우상이 있다. 제사장과 토템과 의식도 있다. 사무실이나 헬스장이나 스튜디오와 경기장 같은 신전에서, 행복한 삶이라는 복을 얻고 액운을 물리치려고 거기서 제사를 드린다. 미모와 권력, 돈과 성취의 신이 바로 우리 개개인의 삶과 사회 전반에서 신적 위치를 점한다.[12]


복음으로 우상을 깨뜨려라  


팀 켈러는 답이 되는 기독교에서 문화 속에 있는 신념을 드러내야 한다고 강조한다. 


요즘 시대 사람들의 생각 밑에 당연한 듯 깔려 있는 배후 가정도 많다. 문화가 기독교에 관해 우리에게 주입하는 이런 신념들 때문에 기독교는 점점 더 개연성이 떨어져 보인다. 이런 신념은 보통 논증 과정을 거쳐 명확하게 주어지지 않는다. 연예와 소셜 미디어의 이야기와 주제 속에 녹아들어서는 우리 사상을 파고든다. 그러면서 어느새 “원래 그런 것”으로 받아들여진다. 이런 작업은 상당히 끈질겨서, 많은 기독교 신자의 마음과 생각에서조차 신앙은 점점 현실성이 없게 느껴진다. 아마 처음에는 본인도 알아차리지 못할 것이다.[13]


결국 우리의 마음의 우상을 바꿀 수 있는 것은 오직 그리스도만을 높이는 복음뿐이다. 그 예로 바울은 고린도후서 8장에서 고린도 교인들에게 재정적인 후원을 하라고 권면한다. 여기서 그는 교인들이 재정 사용에 있어 서로 베푸는 관대한 마음을 갖기를 바란다. 그렇다고 억지로 후원하도록 하지 않는다. 그는 사도로서 명령하여 헌금하도록 만들 수도 있었을 것이다. 그러나 바울은 자신이 명령하기를 원치 않는다고 하며 오히려 그들에게 복음에 관해 생각해 보라고 요구한다. 


여러분은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를 알고 있습니다. 그리스도께서는 부요하나, 여러분을 위해서 가난하게 되셨습니다. 그것은 그의 가난으로 여러분을 부요하게 하시려는 것입니다. (고린도후서 8:9)


바울은 고린도 교인들의 마음이 먼저 자신을 내어 주신 예수님의 관대한 은혜에 감동하도록 이끌었다. 즉 그리스도의 관대하심을 통해 어떻게 그들이 구원받았는지 생각하도록 일깨우는 것이다. 이를 통해 그들 역시 관대한 마음을 갖게 되기를 바라고 있다. 사람이 타인에게 관대한 마음을 갖기 어렵게 만드는 두 가지 요소가 있다. 바로 교만과 염려이다. 


어떤 이들은 자신이 번 돈으로 자신이 쓴다고 생각한다. 스스로 열심히 일해서 모은 나의 재산이라고 생각하는 것이다. 하나님이 허락하셔서 주신 선물이라는 생각이 아니라 스스로 얻은 노력의 결과라고 생각하는 태도가 바로 교만이다. 또 다른 요인은 염려이다. 자기 재물을 타인을 위해서 사용하면 자기 스스로가 위태로워질 수 있다고 생각하는 것이다. 만일의 사태에 대비하지 못할 수 있다는 태도이다. 바울은 사람들이 관대하지 못한 이유가 바로 그들의 마음에 있는 문제, 즉 교만이나 염려와 같은 내면의 동기 때문이라는 사실을 알았다. 따라서 그는 이런 내면의 정서에 반응하며 그들에게 주 예수 그리스도를 생각하라고 말한다. 그리스도가 자신을 전부 내어 주심으로써 그들이 구원받게 되었기 때문이다. 이런 복음을 묵상할 때 우리 마음속에 있는 교만이 깨어지고 우리가 구원받은 죄인이라는 사실을 깨닫게 된다. 또 복음을 묵상하면 염려가 사라지게 된다. 예수님이 우리를 위해 행하신 일은 자신의 목숨을 버리는 사랑이시다. 우리를 구원하기 위해서라면 무엇이든 하신다는 사실을 알게 된다. 우주의 가장 강력한 존재가 우리를 사랑하시는데 우리가 무엇을 염려하겠는가?[14]


바울은 헌금을 이야기하면서 가난하고 힘든 사람들의 상태를 이야기하지 않는다. 불쌍한 사람들의 영상을 보고 헌금을 했다면, 그것은 감정(emotion)의 변화에 불과하다. 몇 달이 지나면 다시 원상태로 돌아오게 될 가능성이 크고, 자신이 힘들어지면 헌금을 하지 않을 가능성도 높다. 참된 변화인 정감(affection)이 변화되려면 사람의 마음 깊은 곳에 있는 ‘물질주의’가 깨져야 한다. 그 물질주의라는 우상이 깨지고 그 마음속에 그리스도의 복음이 심어질 때 자신의 시간과 돈과 에너지를 다른 사람을 위해 기쁘게 희생할 수 있는 복음의 삶을 살 수 있게 된다. 의지적으로 행동을 바꾸려고 하거나, 아니면 돈이라는 피상적인 우상만을 다루는 것이 아니라 사람 안에 있는 교만과 염려의 문제를 해결할 때 비로소 참된 변화를 경험할 수 있게 된다. 


팀 켈러는 죄와 복음의 관계를 우상숭배를 통한 회개와 그리스도를 주인으로 모시는 삶을 통해 설명하고 있다. 복음은 좋은 소식이기 전에 나쁜 소식이 되어야 한다. 우리가 죄인 되었다는 나쁜 소식을 깨닫게 하는 좋은 방식이 바로 우상숭배의 관점으로 죄를 다루는 것이다. 이것은 행위보다 더 깊은 마음의 동기를 다루어주며, 또한 죄로 생각하지 않았던 도덕의 탈을 벗게 해준다. 팀 켈러는 탕부 하나님에서 이렇게 말했다.


바리새인들은 자신들의 죄를 회개하지만, 그리스도인들은 우리의 죄뿐 아니라 우리의 의도 회개하는 사람들이다.



1. 팀 켈러, 센터처치, 271.

2. 팀 켈러, 내가 만든 신, 22.

3. 같은 책, 14.

4. 아우구스티누스는 하나님을 향유의 대상으로 말하지만, 사람도 향유와 사용의 대상이라고 말한다. 사람을 향유한다고 할 때도 하나님보다 더 향유의 대상이 되어서는 안 된다. 

5. 같은 책, 19. 

6. 팀 켈러, 당신을 위한 사사기, 179-180.

7. 팀 켈러, 탕부 하나님, 71.

8. 팀 켈러, 같은 책, 116. 

9. 같은 책, 175.

10. 테리 이글턴, 신의 죽음 그리고 문화, 6.

11. Tim Keller, “Tim Keller Reflects on David Powlison(1949-2019)

12. 같은 책, 15.

13. 팀 켈러, 답이 되는 기독교, 16. 

14. 스티브 엄 엮음, 복음만이 모든 것을 바꾼다, 3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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